[진중권의 놀이와 예술]정리정돈 놀이 [동아일보 2004-10-04 23:26] 광고 [동아일보] 《해묵은 싸움이다. 어머니는 도대체 어수선한 것을 참지 못한다. 어린 시절 방에 플라스틱 모델을 늘어놓으면, 가차 없이 빗자루로 쓸어 상자에 털어 넣곤 하셨다. 이 과정에서 불쌍한 나의 병사들은 중상을 입기도 하고, 때로는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없어진 놈들은 가끔 쓰레기통 속에서 내 눈에 띄어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내게는 그것들이 예술적으로 연출한 전투장면의 미장센이지만, 어머니에게 그것은 기동을 불편하게 하는 거추장스러움일 뿐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전공이 미학이라서 그런지 글 한 번 쓰려면 미학, 철학, 미술사에 각종 화집 등 온갖 책들을 바닥에 늘어놓게 된다. 남들에게는 혼란스러워..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거울 반사 이용한 만화경 [동아일보 2004-09-21 00:51] [동아일보] 내 만화경(萬華鏡)은 조잡했다. 거울 세 장을 삼각기둥이 되도록 맞붙이고, 그 안에 조그맣게 오린 색종이 조각들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60도-60도-60도의 ‘쓰리 미러 시스템(three mirror system)’이었으니, 정삼각형이 세 방향으로 무한히 퍼지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이라 그 영상이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대학 다닐 때던가?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의 작품을 처음 보고 만화경 속의 색종이를 떠올렸던 기억은 난다. 일본의 어느 도시에서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화경을 보았다. 일부러 짬을 내 찾아간 만화경박물관은 폐교된 산골 초등학교만큼이나 누추했다. 그 허..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불꽃놀이 [동아일보 2004-09-13 22:21] [동아일보]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처음 갖게 된 기억이 있다. 내게 그것은 김포공항 위의 밤하늘에 터지던 불꽃놀이의 영상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무슨 계기로 불꽃놀이를 했을까? 기록을 뒤져보니 당시에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본 꽃불은 그를 위한 것이었을 게다. 1966년 가을에 본 영상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네 살 꼬마의 눈에 불로 만든 꽃이 퍽 인상적이었나 보다. 불꽃놀이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당연히 화약을 발명한 문명에서 시작되었을 게다. 서양에 ‘연금술’이 있다면, 중국에는 연단술(煉丹術)이 있었다. 서양의 화학이 금을 만드는 꿈에서 태어났듯이, 중국의 화약은 불로장생의 ..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미로찾기 놀이 [동아일보 2004-09-06 22:41] [동아일보]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포세이돈 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영험한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로 하여금 그 수소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둘 사이에서 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한 괴물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미노타우루스였다. 미노스 왕은 이 괴물을 가두어놓기 위해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을 짓게 한다. 미로의 근원은 멀리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미로의 선구는 다이달로스가 지었다는 이 크레타의 미궁이다. 다이달로스는 어떤 방법으로 미로를 만들었을까? ..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인형과 로봇, 오토마타의 꿈 [동아일보 2004-08-23 18:12] [동아일보] ‘푸코의 추’를 처음 본 건 파리의 ‘기술박물관’에서였다. 별 생각 없이 들른 허름한 박물관에서 지구의 자전을 증명했다는 그 유명한 도구를 보았으니, 운이 좋은 셈이다. 하지만 거기서 내 관심을 끈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16∼18세기 궁정에서 갖고 놀았다는 움직이는 자동기계들. 듣자 하니 루이 14세가 자동기계 광(狂)이었단다. 그러니 거기서 내가 본 것은 대부분 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오늘날 우리 눈에 그 인형들은 조잡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것들은 첨단과학을 동원해 제작한 고상한 오락이었다. 어쨌든 그 인형들이 내게 준 인상은 강렬한 것이었다. 나 말고..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마술환등놀이, 라테르나 마기카 [동아일보 2004-08-16 21:48] [동아일보] 어린시절 환등기가 무척 갖고 싶었다. 무려 한 달 동안 용돈을 모아 소년잡지 광고에서 본 조립식 환등기를 주문했다. 물건은 알량하기 짝이 없었다. 렌즈 하나, 널빤지 몇 장, 소켓과 플러그, 편집하다가 잘라버린 것으로 보이는 필름 몇 장. 렌즈를 달고, 소켓을 부착하고, 널빤지들을 아교로 이어 붙여 대충 환등기의 꼴을 만든다. 그리고 전원을 올리니, 와우, 정말로 벽에 희미한 이미지가 나타난다. 얼마나 신기한가? 신기함도 일상이 되면 시시해지는 걸까? 어린시절 환등기에 매료됐던 나 자신도 지금은 미술사 강의에 슬라이드를 사용하며 거기서 아무런 신기함도 못 느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어둠의 비밀, 카메라 옵스쿠라 [동아일보 2004-08-10 01:05] [동아일보]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의 ‘부악백경(富嶽百景)’. 후지(富士)산의 100가지 얼굴을 표현한 연작인데, 그 중에는 그 거대한 산이 물구나무를 선 것도 있다. 왼쪽 맨위 그림의 장소는 찻집이라고 한다. 차를 마시러 온 두 사내가 창호지 문에 나타난 후지산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있다. 하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청소를 하다말고 오른손으로 맞은편 창호지 문에 난 조그만 구멍을 가리킨다. 바로 거기에 마술의 비밀이 숨어 있다. 카메라 옵스쿠라, 즉 암실(暗室)효과다. ● 카메라의 어원은 ‘어두운 방’ 암실효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실루엣 판타지, 그림자놀이 [동아일보 2004-08-02 18:04] [동아일보] 옛날엔 왜 그리 정전(停電)이 잦았는지. 대낮처럼 집안을 밝히던 전등이 나가면, 장롱이나 서랍에 숨어있던 양초가 부랴부랴 모습을 드러낸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촛농을 바닥에 떨어뜨려 초를 고정시키면 방안은 곧 은은한 빛의 세계가 된다. 이제 벽에 그림자의 향연을 펼칠 차례. 벽 근처에 손을 갖다 대고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면 벽에서는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고, 개가 입을 벌려 멍멍 짖어 대고, 까마귀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모든 사물은 이렇게 제 안에 다른 것의 형상을 품고 있다. 매일 보던 손에 이렇게 많은 동물이 들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림자가 비로소 사물이 품은 잠재적 ..
[진중권의‘놀이와 예술’]발상의 대전환, 물구나무서기 [동아일보 2004-07-26 18:33] [동아일보] 아르키메데스는 무한히 긴 지렛대만 있으면 지구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구를 드는 데에 번거롭게 지렛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거꾸로 서라. 어차피 우주에는 위아래가 없으니 곧 지구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린 시절 물구나무를 서며 동네 아이들은 이런 썰렁한 농담을 하곤 했다. 나는 학교 철봉대에 두 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매달리기를 좋아했다. 지구를 짊어진 아틀라스의 완력보다 거꾸로 본 세상의 시각체험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나 할까? ‘물구나무서기를 못 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이게 좀 더 멋있게 들린다. 어쨌든 철봉에 매달려 바라본 세상에서는 모든 사물이 고드름..
[진중권의‘놀이와 예술’]상상력의 축제, ‘숨은 그림 ’ [동아일보 2004-07-19 18:26] [동아일보] 어린 시절 구독하던 어린이신문에는 매일 ‘숨은그림찾기’가 실렸다. 대개 짤막한 이야기에 딸린 삽화인데, 그 안에는 빗자루 다리미 나뭇잎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숨어 있었다. 그림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숨은 놈을 발견하면, 행여 도망이라도 갈까 잽싸게 동그라미를 쳐놓곤 했었다. 대부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매번 한두 놈은 꼭꼭 숨었다가 한참이 지나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숨바꼭질은 아이들만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사물도 숨바꼭질을 한다. ○ 술래야, 술래야, 나 찾아봐라 아이들을 다 찾아내면 술래는 어떻게 하던가? 이제는 자기가 숨어야 한다. 숨은 그림을 다 찾아냈는가? 그럼 이제 우리가 ..
[진중권의‘놀이와 예술’]視覺의 장난, 왜곡상 - 거울놀이 [동아일보 2004-07-12 18:29] [동아일보] 어디서 봤더라? 어린 시절 누구나 신기한 거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거울은 몸을 뚱뚱하게 만들고, 다른 거울은 몸을 홀쭉하게 만든다. 볼록거울과 오목거울 앞에서 아이들은 마치 마법에나 걸린 듯이 우스꽝스러운 뚱보나 홀쭉이로 변한다. 마법에 걸린 몸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왜 없겠는가. 볼록거울 위에 비친 왜곡상은 같은 곡률의 오목거울에 비추면 마법이 풀린다. 맨 오른쪽 그림○1 역시 마법에 걸렸다. 저게 대체 뭘까? 마법을 풀려면 원기둥 모양의 실린더 거울이 필요하다. 7년 전이던가? 로마의 한 박물관에서 저런 유의 그림을 처음 접했다. 전시된 원화 옆의 테이블 위에는..
[진중권의‘놀이와 예술’] 視覺의 장난, 왜곡상 [동아일보 2004-07-05 18:46] [동아일보] 작년 겨울 베를린의 어느 허름한 화랑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보았다. 전시대 위에 커다란 사전처럼 생긴 두꺼운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내놓은 작품이라고 한다. 펼쳐진 책의 한 페이지에는 글자 대신 두꺼운 먹줄들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져 있었다. 들춰 보니 다른 페이지들에도 역시 수직으로 그어진 먹줄들만 인쇄되어 있다. 마치 바코드를 크게 확대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대체 뭘까? 비밀은 시선의 각도에 있다. 그 책은 정면으로 보는 게 아니라, 눈이 지면과 15도 정도의 각도를 이루게 해서 봐야 한다. 실제로 눈을 지면 아래에 바짝 붙인 채 비스듬히 올려다보니, 놀랍게도 그 먹줄들이 알..
[진중권의‘놀이와 예술’]체스, 그 숨막히는 두뇌싸움 [동아일보 2004-06-28 18:31] [동아일보] 튀니지의 한 시장에서 근사한 대리석 체스를 발견했다. “130디나르!” 어쭈, 너희에게 메디나가 있다면 우리에겐 남대문이 있다. “30디나르!” 흥정은 깨졌다. 며칠 후에 벌어진 2회전에서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60디나르에 물건을 손에 넣었다. 아랍권에서는 체스를 두는 것만이 아니라 체스를 사는 것도 머리싸움. 그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알라에게 맹세코!”라고 하면 대충 깎을 만큼 깎은 것이다. ○ 체스와 로그의 탄생 체스는 인도에서 발생했다. 탄생 설화 자체가 체스의 이성적 본질을 말해준다. 인도의 발힛 왕이 체스를 발명한 현자(賢者)에게 상을 내리려고 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
[진중권의‘놀이와 예술’]카드속의 ‘조커’ 세상밖으로… [동아일보 2004-06-21 18:40] [동아일보] 한 조의 카드는 52장이라고들 한다. 에이스(A)에서 10까지 열 장의 카드에 잭(J), 퀸(Q), 킹(K)을 더하면 13. 거기에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의 4를 곱하면 52장. 그뿐인가? 아니, 실은 두 장이 더 있다. 바로 ‘조커’다. 조커는 한 조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다. 사회 안에 있으면서 사회 밖으로 추방된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조커는 가끔 카드 밖으로 튀어나온다. 영화 ‘배트맨’에서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조커다. 이 악동은 상상을 초월하는 짓거리로 사회질서를 뒤엎으려 든다. 사람만 해치지 않으면, 이 예술적 악마가 하는 짓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조커가..
[진중권의‘놀이와 예술’]주사위는 던져졌다 [동아일보 2004-06-14 18:29] [동아일보] 옛날 인도에 한 임금이 있어, 세 명의 현자(賢者)를 곁에 두고 늘 지혜를 구했다. 어느 날 그가 현자들에게 삶에서 운과 이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물었다. 한 현자가 가로되 “운이 가장 중요하여 아무리 똑똑한 이도 운명을 피해 갈 수 없다”고 했다. 다른 현자는 “중요한 것은 이성이며, 현명한 자는 어떤 불운도 이성으로 극복한다”고 했다. 세 번째 현자는 “운과 이성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왕은 이들에게 각자 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 세 현자가 왕궁으로 돌아왔다. 삶에서 운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현자는 주사위를 증거물로 내놓았다. 이성이 가..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놀이에서 세계를 본다” [동아일보 2004-06-07 18:44] [동아일보] 《베스트셀러인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진중권씨(41·중앙대 겸임교수)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미학 세계’의 안내자로 나선다. 15일부터 매주 화요일 다양한 놀이를 통해 아름다움의 원리를 풀어내는 ‘놀이와 예술’ 시리즈를 집필하는 것. 그의 책 ‘미학 오디세이’는 미학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씨를 만나 왜 ‘놀이와 예술’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주사위놀이에 깃든 세계관 “미디어의 중심이 논리적인 문자매체에서 감각적인 영상매체로 이동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사 역시 ‘진리’에서 ‘재미’로 바뀌어가고 있어요. ‘놀이’는 ‘재미’를 추구한..
찻잔을 감싼 손가락이 굵고 험했다. 책장을 뒤적이는 인문학자로서는 몹시 투박한 진중권의 손에는 옹이가 박혀 있었다. “어려서부터 목공을 해서 성한 데가 없어요.” 최근에는 메서슈미트 전투기 모델과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비행정 모델을 조립했다. 두드리면 현금 출납기 영수증처럼 좌르륵 출력되는 진중권의 말 속에는 “놀다”라는 동사가 자주, 흔쾌히 끼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을 예찬하는 우파 이데올로그들을 필마단기로 논파한 책 (1998)부터 진중권의 글은 흥겨운 유희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알려진 대로 이 책의 제목은 전 조갑제 편집장이 쓴 박정희 전기 의 일갈을 (파워레인저 포즈로) ‘반사’한 다음 울화통의 느낌표를 보탠 것이다. 진중권은 따로 무기를 구하지 않고 상대가 빗맞힌 돌을 주워서 도로 던졌다.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