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라서 안 된다고?” vs “ 여성은 주부 아니라 사회인”
2007-11-13 (화) 09:17 헤럴드생생뉴스
‘신사임당이냐, 유관순이냐.’ 2009년 발행할 새 고액권 지폐 인물을 둘러싼 논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5만원권 지폐의 인물에 신사임당이 선정된 것을 두고 그 적정성 논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만약 1970~80년대 신사임당이 지폐의 인물로 선정됐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이 일었을까. 여성의 역할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7년 11월 13일, 논란의 두 주인공인 유관순 열사와 신사임당이 헤럴드경제 지면에 환생했다. 그들의 변을 들어보자.
▶“현모양처라서 안 된다고?”---신사임당
47년 만에 여성으로서 화폐 인물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기쁨도 잠시, 저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 씁쓸합니다.
제가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상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여성차별적인 유교적 질서에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모양처가 가부장제하의 이상적 여성상이라는 점에서 저를 택한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저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글을 썼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작가이자 화가였던 셈입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던 저는 집안에서도 남자 이상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결혼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무산됐지만 아버지는 제게 가계를 잇게 할 생각도 하고 계셨습니다.
결혼 후에도 친정에 머물던 저는 38세 되던 해, 시어머니의 병이 깊다며 간청하는 남편의 뜻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그때 대관령을 넘으며 남긴 시가 바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입니다.
그림 역시 제 삶에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단순히 소일거리나 취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솜씨가 널리 알려지면서 당시 명문가엔 한두 점씩 제 그림이 걸려 있곤 했습니다.
48세에 시댁인 파주에서 세상을 뜨며 저는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시로는 이례적인 제 유언을 두고 훗날 적극적이고 할 말은 한다는 평 뒤에 억척스럽다는 수군거림이 남기도 했습니다.
역시 저는 현모양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선시대 가부장제 아래였다 해도 그저 순종적이기만 한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제 아들 율곡은 제 일생을 기록한 글에서 ‘아버지가 어쩌다 실수가 있으면 반드시 잘못을 지적하고,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하였으며, 주변이나 아랫사람들이 허물이 있으면 꾸짖으니 종들도 모두 존경하며 떠받들고 좋아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후세 사람들이 제게 미화된 현모양처의 상을 덧씌운 이미지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걱정되는 것은 저를 거부하는 이유가 오히려 여성의 삶을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겁니다. 모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고 직장에서 성공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심리적 강박은 아닌지요.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꾸려가는 수많은 여성은 그저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자칫 여성을 여성 속에서 차별하는 과오일지도 모릅니다. 여성을 모성으로 한정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완전히 배제하라는 것도 무모합니다.
물론 현명한 어머니와 좋은 아내가 전부가 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야 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거기에 성공적인 직장생활이 덧붙여지긴 했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남성들 역시 ‘현명한 아버지와 좋은 남편’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지폐 모델을 선정한 절차에 관해서는 할 말 없습니다. 그러나 현모양처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과 사회를 이분할 필요없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여성이라면 모델이 될 만한 것 아닌가요.
▶“여성은 주부가 아닌 사회인”---유관순
어느 날 보니 저도 모르게 제가 신사임당과 싸우는 모양새가 돼 있더군요.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안의 본질을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어봅니다.
제가 화폐 인물로 적당하다고 보신다면 아마도 ‘독립운동’ 경력 때문일 것 같습니다. 저는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교육자인 아버지로부터 일곱 살 때부터 글을 배웠습니다. 기독교계 신식 학교인 이화학당을 다닌 덕에 여성 문제와 기타 사회 문제에 관해서는 또래에 비해 밝은 편이었습니다.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한 1917년 무렵인가, ‘잔 다르크’를 읽으며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19년 친구들과 결사대를 조직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 해 3월 1일 만세 시위가 열렸고 저는 고향을 비롯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시위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근 한 달 만에 만세 시위 도중 체포됐으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지 4년 만인 20년 세상을 떠났지요.
여성으로서 세상에서 무언가를 했다고 자랑하기에 제 인생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그럼에도 사회 문제에 앞장섰던 당당한 제 모습을, 많은 후대의 여성이 높이 평가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의 ‘여성상’이 되는 것에도, 화폐에 얼굴이 삽입되는 것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선덕여왕, 허난설헌, 만덕, 나혜석 등 저보다 위대한 여성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제가 불만인 것은 아직도 과거의 시각으로 여성의 본분을 규정짓는 것입니다. 한국은행은 새 5만원권 화폐에 새겨질 여성 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했다고 최종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도안 인물을 변경할 계획이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한국은행 측이 밝힌 선정 이유는 ‘남편을 내조해 벼슬의 길로 나아가게 해 아내의 소임을 다하고,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이이를 조선의 대학자로, 매창을 예술가로 성장시켜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줬다는 점’입니다.
‘남편 내조’와‘영재교육’이 이 시대 여성들의 소임입니까. 만약 신사임당 선생을 ‘주부’가 아닌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조명했다면 이런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성과 나란히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남편의 출세와 자녀의 영재교육이 여성의 최고 소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고도 몽매한 일입니다.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의 유교사회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기 못했다면, 조선시대로 다시 퇴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성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여성상이나 훌륭한 이 세상의 어머니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입니다. 가부장제하의 억압된 여성상을 추앙하고 강요하는 것을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호전적”이라고 나무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제가 편히 잠들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제가 이렇게 나서서 여성을 대변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나오고 있는 시대에 말입니다.
윤정현 기자(hit@heraldm.com) 김소민 기자(she@heraldm.com)
- `헤럴드 생생뉴스`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